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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이야기

대상신동욱 씨

본상보눔 덴티스트

본상사단법인 온기

본상조용한 수다

특별상배금향 씨

대 상
신동욱 씨
험난한 땅을 둥글게 굴러사는 저 휠체어 바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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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68) 씨는 자신의 선행을 일종의 ‘선불’이라 낮춰 말한다. 사는 동안 열심히 나누고 살면, 훗날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을 향한 온정으로 되돌아올 거라 믿는 까닭이다. 그의 아들은 뇌병변장애인이다. 아들이 휠체어를 타게 된 뒤로, 지역 내 장애 인들을 위한 휠체어 수리와 기증을 오래도록 한결같이 해오고 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휠체어 천사’라 부른다. 그의 꾸준한 ‘선 불’이 누군가의 불편한 삶에, 소중한 ‘선물’이 돼주고 있다.

아픔에서 나눔의 샘물을 긷다

요즘 그는 병원에서 밤을 보낸다. 환자 옆 보조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에 일터로 나오는 생활을 벌써 여러 달째 해오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의 얼굴엔 이렇다 할 동요가 없다. 탄수화물의 분해를 돕는 아밀라아제처럼, 아픔의 소화를 돕는 효소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나눔’이다. 든든한 성분 하나 가슴에 품고, 그는 오늘도 자기 앞의 생을 담담히 이어간다.

“아들 녀석이 지난 1월 전동휠체어를 타고 홀로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여러 번 수술을 받고도 여태 병원에 있어 요. 가슴은 아프지만,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요. 더 열심히 나누며 살면, 아들의 미래도 휠체어 바퀴처럼 둥글게 굴러갈 거라 믿어요.”

그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4년 어느 날 가족들이 함께 탄 차량이 대형 사고를 당했고, 만삭의 아 내가 크게 다치면서 출생을 목전에 둔 아들에게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뇌병변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에게 휠체어를 처음 마련해준 건 1992년 특수학교인 대구보건학교에 아들이 입학하면서다. 업고 다니는 것이 더는 불가능해서, 망가진 휠체어 두 대 를 얻어와 한 대를 새로 만들어줬다. 그날 이후 아들 학교 학생들의 휠체어가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고장이 눈에 띌 때마 다, 그때그때 기꺼이 손을 봐줬다.

“몇 년 뒤인 1997년 ‘수동휠체어를 수리해준다’는 대구광역시장애인재활협회의 홍보문구를 한 언론매체에서 봤어요. 어떻게 고치 는지 보고 싶어 찾아갔는데, 봉사자로 나선 사회복지사 분들의 솜씨가 영 어설프더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제가 직접 나섰어요. 그 때부터 매주 수요일, 지역 내 복지관을 돌며 휠체어 수리 봉사를 시작했죠.”
관심이라는 이름의 기술

하지만 휠체어는 수요일에만 망가지지 않았다. 재활협회 측에서 연락이 오면, 하던 일을 잠시 접고 언제든 그 즉시 달려갔다. 경험 이 늘어나자 아이디어도 덩달아 샘솟았다. 휠체어 탑승자의 옷이 타이어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조장치를 만들기도 하고, 우산 꽂 는 공간이나 컵 놓는 홀더를 휠체어 한쪽에 장착하기도 했다. 중증장애인들의 안전을 위해 폐차장에서 안전띠를 구해와 달아주기 도 했다. 휠체어에 안전띠가 없던 시절이었다. 관심이 곧 기술이고, 사랑이 곧 실력이었다.

“저신장증 장애인의 휠체어를 고쳐드린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체구가 작은 그분들은 어린이용 휠체어를 타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이들을 위한 거라 색깔이 알록달록해요. 그게 어쩐지 미안해서, 어른용 휠체어를 그분 몸에 맞게 잘라드렸어요.”

봉사가 일상이 되면서 직업도 변경했다. 근근이 운영해오던 식당을 접고, 1998년 대구 서구에 휠체어판매·수리업체를 오픈했다.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정보도 교류하고 봉사도 함께하는 기쁨을 그렇게 누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게 뒤편엔 ‘버려진 휠체어’의 부품 들을 모아놓은 창고가 있다. 더는 생산되지 않는 제품이 볼품없이 망가져 그에게 와도, 손색없이 이내 고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전동휠체어를 쓰는 분들 가운데는 성능 좋은 새것보다 몸에 익숙한 헌것을 계속 쓰려는 분들이 많아요.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는 단 순한 기계가 아니라 자기 몸의 일부거든요. 사람의 병을 고치는마음으로 휠체어를 손보려 노력해요.”

지금껏 몇 대의 휠체어를 무상으로 고쳐줬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1만2천 대를 끝으로 더는 헤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광 역시에서 바우처 형태로 수리비를 지원하기 시작한 10년 전부터는 지원사업비가 소진되는 하반기에 무상수리를 해주거나, 장애 인이 지자체로부터 지원받는 금액 이상의 수리비는 받지 않는 식으로 봉사를 이어간다. 세상이 변해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을 그는 한결같이 해나간다.
수리에서 기증까지, 봉사에서 성장까지

그가 ‘휠체어 천사’로 불리게 된 건 수리 봉사 때문만이 아니다. 봉사 초창기 장애인들 집으로 무상수리를 자주 나갔던 그는 그분들 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지 톡톡히 알게 됐다. 휠체어라도 바꿔주고 싶어 생각해낸 것이 900여 군데 교회에 휠체어 기증 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는 거였다. 한 곳의 도움으로 대구보건학교 학생 두 명에게 휠체어를 선물했다. 두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 이제 직접 나서고 싶었다.

“1998년 한국장애인부모회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했어요. 그때 받은 상금 50만 원으로 경량 휠체어를 사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장애 학생에게 기증했죠. 수상의 기쁨이 더 커지더라고요.”

1999년 ‘자랑스런 구민상’을 수상하며 받은 200만 원도, 2011년 ‘정재문사회복지상’ 수상으로 받은 300만 원도, 그는 모두 휠체어 를 기증하는 데 썼다. 상금이 없어도 기증은 계속됐다. 2011년 대구장애인재활협회에 400만 원의 보장구 나눔 성금을 기부한 것 을 시작으로, 2020년 12월까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대구장애인재활협회를 통해 모두 9,200만 원 상당의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를 저소득장애인에게 전달했다. 또 다른 보람이 가슴에 쌓여갔다.

“형편이 좋지 않아 올해는 쉬어볼까 싶다가도, 연말이 되면 마음을 고쳐먹게 돼요.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휠체어 기증을 쭉 해나가고 싶어요.”

1998년 ‘장한 어버이상’ 수상을 계기로 대구장애인부모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지난 2012년까지 대구장애인부모회 부회장과 회장 을 맡으면서, ‘남구장애인주간보호센터’와 ‘대구장애인가족지원센터’ 개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장애인 부모들이 서로 힘이 돼주도 록 자조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봉사자로서의 철학을 갖추기 위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모두 아들 덕분에 시 작한 일이다. 자식도 부모를 키운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이미 안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살면, 훗날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겠지 생각했어요. 그 마음으로 봉사를 시 작했는데, 이젠 나누는 일 그 자체가 행복이에요.”

그는 얼마 전 전동휠체어 충전기를 가게 바깥에 설치했다. 밤늦게 길을 가다 휠체어가 방전돼도 누구든 편하게 충전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불편을 알아보는 눈은 점점 밝아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손은 점점 빨라진다. 나눔으로 청춘을 다시 산다.
본 상
보눔 덴티스트
치아를 치료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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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누구부터였는지 모든 게 가물가물하다. 그들에게 ‘처음’이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 탓에, 그리 대수롭게 여길 일도 아니기에 그렇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오늘날까지 반평생 가까이 봉사에 바쳐왔음에도, 그저 치과 진료가 절실한 이들이 있 어 봉사를 했을 뿐이라는 ‘보눔 덴티스트’의 봉사자들. 그들이 그 오랜 세월 행해온 것은 어쩌면 치료가 아닌 치유였을지도 모른다

아픔을 보듬고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치아에는 삶의 흔적이 묻어있다고 한다. 살아온 환경과 방식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영 보자애원에 머무는 이들 도 마찬가지다. 장애를 가졌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거리를 떠 돌며 살아야 했던 여성 노숙인들. 썩고, 부러지고, 빠진 치아와 붓고, 곪고, 내려앉은 잇몸을 보며 고단하고 고통스러웠을 그들의 삶을 짐작해본다.

“이곳에 와서 진료 봉사를 한번 해보면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딱한 마음이 들 정도로 치아 상태가 심각하거든요. 선배나 동료 의 권유로 몇 번만 봉사에 참여하고자 나오셨던 분들도 30년째 봉사하고 계세요.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진료해줄까 하는 걱 정이 들어서죠.”

서울시립영보자애원(이하 시설)은 연고가 확인되지 않고, 장애 정도가 심해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거나, 각종 질환으로 생명까 지 위협받고 있던 서울시의 여성 노숙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1985년에 설립된 시설이다. 여성 노숙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의 식주뿐만이 아니다. 오랜 노숙 생활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강. 그러나 혼자서는 병원에 갈 수 없을 정도의 장애를 가졌거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했던 그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의료서비스였다. 특히 평 생 양치질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왔던 그들의 치아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고, 치아는 물론 건강을 위해 치과 진 료가 절실했다.

“보눔 덴티스트의 봉사자분들은 시설이 개원하던 해인 1985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의료봉사를 실천하고 계세요. 양치질 교육부 터 잇몸질환 관리, 단순 발치 및 신경치료, 치아우식 제거 및 수복, 스케일링, 보철 및 틀니 시술 등 치과 진료 서비스 무료 제공은 물 론 정기 구강검진 실시를 통해 생활인(시설에 입소한 여성 노숙인)들의 구강질환 예방에도 힘써주고 계시죠. 생활인들이 장애가 있는 데다가, 시설 일손이 부족한 탓에 외래진료는 사실상 불가능한 저희로서는 은인이 아닐 수 없어요.”

원장인 박혜경 씨는 보눔 덴티스트가 없었다면 생활인들이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백하듯 두 손을 꼭 모은 채 봉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시설의 역사와 함께 해온 보눔 덴티스트

보눔 덴티스트의 역사는 시설이 문을 열던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원장이었던 류영도 신부는 시설에 입소한 노숙인들 의 치아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 알고 지내던 치과 전문의 홍성익, 김수남, 이건주 씨 등에게 진료 봉사를 의뢰하게 된 다. 진료대조차 없었던 환경에서도 그들은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생활인들의 치아 건강을 살폈다. 또한, 동료 의사들에게 도움의 손 길이 절실한 곳이 있다며 봉사를 적극적으로 권했고, 이후 제자, 후배, 직원 등 알음알음으로 참여가 늘어 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개별적인 참여로 진료가 이루어졌지만, 인원이 점차 늘어나면서 1987년부터는 ‘영보 치과 진료 봉사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정기 적인 봉사를 시작했다. 치과 전문의와 치위생사가 팀을 구성하여 매주 일요일에 전문적인 치 과 진료를 제공하는 한편, 1987년, 1989년, 2001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치과용 진료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각종 치아·잇몸질환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조차 어려웠던 생활인들은 숙련된 치과 전문의와 치위생사들에게 맞춤형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음 으로써 건강은 물론 웃음 또한 되찾을 수 있었다.

“진료 봉사를 막 시작했을 당시에는 생활인들이 치과 진료를 받아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마치 치과에 처음 오는 아이처럼 입을 꼭 다물거나 겁에 질려 눈물을 흘 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진료하는 시간보다 ‘내 속을 보여줄 수 있는 익숙한 사람’이되기 위해 두 눈을 마주치고 입담도 겨루며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이 더 필요했죠. 예전만큼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분들을 진료 해야 하니 여전히 주의하는 부분들이 많아요. 진료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자칫 부상이나 사 고로 이어질까 조심스럽고요.”  
아저씨 선생님이 할아버지 선생님이 되기까지

시설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35년. 진료대에서 무섭다며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생활인들은 이제 그들을 누구보 다 반갑게 맞이하고 살갑게 따른다. ‘아저씨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청년 의사들은 어느덧 희끗희끗한 머리와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 버지 선생님’이 되었고, 진료를 받는 생활인들도 주로 보철이나 틀니 시술이 필요한 할머니가 되었다. 긴 세월만큼이나 기쁜 일 도, 가슴 아픈 일도 참 많았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은퇴를 하신 분들도,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죠. 지금은 열 명의 치과 전문의와 여섯 명의 치위생사가 활동 하고 계시지만, 거쳐 가신 분들을 대략 헤아리기만 해도 백 명은 거뜬히 넘는 것 같아요. 원장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라면, 생 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하셨던 조영필 선생님이 떠오르네요. 평소처럼 봉사하시고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가셨는데, 그 날 저녁에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게 됐죠. 돌아가신 후에도 시설을 위한 헌신은 끝나지 않으셨어요. 당신이 사용하시던 의료기기들 을 모두 기증해주셨던 거죠.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장을 맡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분이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덕분에 저희 는 진료 인력에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현재 보눔 덴티스트의 회장을 맡은 황광세 씨 역시 조영필 씨의 권유로 봉사를 시작했다. 40대에 시작한 봉사는 75세가 된 지금에 도 이어지고 있고, 학생이었던 아들은 어느덧 치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를 따라 봉사에 참여하곤 한다. 나이가 들어 가끔 힘에 부 칠 때도 있지만, 걸어 다닐 수 있는 한 봉사를 계속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생활인들의 고통을 덜 어줄 수 있다는 보람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시설 직원들은 머 리를 맞대고 봉사단에 ‘보눔 덴티스트(Bo˘num Dentist)’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다. ‘선(善)’, ‘안락’을 의미하는 라틴어 ‘보눔 (Bo˘num)’과 ‘치과 의사’를 뜻하는 영어 ‘덴티스(Dentist)’를 합성한 것으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진심으로 보듬는 선 한 마음과 ‘보듬고 나눔’이라는 실천원칙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름이다. 35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묵묵히 봉사의 삶을 살아온 보 눔 덴티스트 봉사자들. 그들이 그 오랜 세월 행해온 것이 단순한 치료가 아닌 치유라는 것을 굳이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우리 는 알 수 있다.
본 상
사단법인 온기
작은 우편함으로부터 펼쳐지는 동화 속 마법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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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에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에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털어놓기 어려워 절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곪고 삭아버린 마음을 후련하게 털어놓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진정으로 내 편에 서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고민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따뜻한 위로가 담긴 손편지까지 전해주는 특별한 우편함이 있다. 사단법인 온기의 ‘온기우편함’이 그것이다

고민을 상담해주는 세상 가장 특별한 우편함

걷기만 해도 왠지 모를 낭만에 젖어 드는 삼청동 돌담길. 그곳에는 마치 동화 속 마법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특별한 우편함, 고민을 적어 넣으면 손편지로 답장을 보내주는 온기우편함이 있다.

“온기우편함 활동을 시작한 건 2017년이었어요. 군대에서 ‘고민을 상담해주는 우체통’을 주제로 한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이런 우체통을 현실로 옮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죠. 의사나 상담사 등 전문가들에게 고민 상담을 받는 것도 좋지만, 일상에서 받는 위로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온기우편함은 사단법인 온기의 대표 조현식(31) 씨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입대 이전에도 야학교사, 위기가정 아동 방과후돌봄, 루게릭병 환우 지원 등 다양한 봉사를 실천할 만큼 누군가를 돕는 것을 좋아했던 그였다. 그래서였을까, 우편함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나무 우편함을 만들었고, 이는 2017년 2월에 비로소 온기우편함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돌담길에 세워졌다.

“우편함이 설치될 공간은 편지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삼청동 돌담길을 선택하게 됐어요. 그곳을 걸을 때면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거든요. 다음으로는 노량진과 신림동을 선택했어요. 취업 준비로 심리적인 고립을 겪고 있을 청년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거든요.”

온기우편함을 찾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설치 초반부터 60통 이상의 편지가 모였던 것이다. 그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더 많은 이들의 고민을 듣기 위해 우편함을 늘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덕수궁 돌담길, 혜화동 마로니에공원과 서울어린이대공원, 명동 우표박물관을 비롯하여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콜센터와 호스피스 병동 등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도 우편함을 설치했다.

“온기우편함은 현재 서울지역 총 아홉 곳에 설치되어 있어요. 아쉽게도 우편함을 없앤 일도 있어요.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거나 행정적인 이유로 설치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지만, 호스피스 병동의 경우에는 편지의 무게감이 저희가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였던 터라 자의적으로 철거하게 됐어요”

소중한 온기님께 온기우체부들이 전하는 위로

온기우편함은 누구나 익명으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나무숲’ 같은 존재다. 익명이기에 부담 없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자신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온기우편함의 역할은 단지 고민을 들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온기우체부라 불리는 봉사자들이 직접 손편지로 답장을 보내주기 때문이다. 온기우체부들은 편지를 보낸 이들을 모두 ‘온기님’이라고 부른다. 유치원생이 든 성인이든 그곳에서는 누구나 온기님이 되고, 온기님의 고민은 곧 온기우체부의 고민이 된다.

“편지는 목요일마다 제가 직접 수거해서 온기 사무실에 모아놓아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함께 편지를 쓰는 일정이 있는데, 온기우체부님들은 이 중 한 번씩 오셔서 편지를 골라 답장을 쓰시죠. 모여서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곳에 편지가 모여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자보다는 여럿이 있을 때 더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이에요. 편지를 다 쓴 후에는 어떤 답장을 썼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만약 온기님의 고민이 어렵거나 무거울 때는 어떤 위로가 좋을지 의논을 하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온기우체부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온라인을 통해 모집한 열 명으로 시작된 온기우체부는 200명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 600명 이상이 함께해 왔다. 온기우체부들로부터 전해진 위로의 편지는 무려 11,000통에 달한다.

“온기우체부들은 일주일에 보통 80여 통의 편지를 써요. 온기님들의 고민이 많을 때에는 100통까지 쓰기도 했죠. 계절이나 시기에 따라 들어오는 편지량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여름이나 겨울보다는 봄과 가을에 많은 편이고,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 편지도 많은 편이에요. 답장은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3~4주 후에 보내드려요. 온기님들의 고민에 충분히 공감하고 적절한 위로를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온기우편함으로 전해지는 온기님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르다. 입시나 취업 등에 실패를 겪으며 자존감이 낮아진 사연,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겪는 사연,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힘겨워하는 사연 등 고민의 원인도 고통의 형태도 제각각이다. 온기우체부들은 그들에게 힘이 되는 위로를 전하기 위해 편지 속에서 친구, 가족 혹은 필요한 그 누군가가 된다. 편지를 받은 온기님들이 답장을 보내올 때도 있다. 서너 장에 달하는 손편지가, 그 속에 담긴 진정성 있는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해오는 것이다. 손편지를 받은 온기님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온기우체부가 된 경우도 있다.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어요. 우편함 제작비부터 편지지, 편지봉투, 우표 구입비까지 사비로 마련하다 보니 운영도, 개인적인 생활 도 어려웠거든요. 취업한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고, 맞는 길을 가는 것일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어요. 직장을 다니며 낮에는 일을, 밤에는 온기우체부 활동을 한 적도 있었 죠. 월급의 절반은 온기우편함에 썼던 것 같아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온기의 가치를 알아봐 주셨던 온기우체부 분들과 저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내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프로젝트로 시작됐던 온기우편함은 올해 초 ‘사단법인 온기’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비영리단체가 되었다. 온기우체부들이 모여 편지를 쓰는 공간 또한 커피숍에서 8평 남짓의 옥탑방을 거쳐 어엿한 사무실로 바뀌었다. 사단법인 온기는 앞으로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온기님과 온기우체부가 ‘이웃 간의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온기우편함을 전국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의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위로를 담은 손편지를 전하겠다는 온기우체부들. 그들의 온기가 세상 곳곳 닿지 않는 곳이 없기를, 그들로 인해 더욱 살맛나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을 담아 응원해본다.

본 상
조용한 수다
언어에서 예술로, 소외에서 소통으로
수상자 영상 보러 가기

수어는 국어와 대등한 고유언어다.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그 사실이 법으로 명시됐다. 2013년 전국 유일의 수어 퍼포먼스 공연단으로 출발해, 수어 교육과 수어 합창 등으로 영역을 넓혀온 ‘조용한 수다’. 법보다 앞섰던 그들의 움직임이, 별처럼 멀었던 그들의 꿈을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간다. ‘많은 사람이 수어를 알면 농인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예술과 교육의 날개를 타고, 그 믿음을 향해 오늘도 비상 중이다.

수어, 예술이 되다

그들에겐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단원들끼리 모으는 회비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지원금도, 조용한 수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빙해온 전문가도 이곳엔 없다. 공연 제작도, 수어 교육도, 자신들의 힘으로 꿋꿋이 해나간다. 대신 그들은 보석 같은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에 기꺼이 뛰어드는 용기, 소외된 누군가를 위해 선뜻 거리로 나서는 패기, 더 널리 수어를 알리기 위해 흔쾌히 주말을 반납하는 결기, 서로 등을 토닥이며 더불어 나아가는 온기…. ‘기세’ 좋은 그들을 보고 있으면, 무엇을 소유해야 행복한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조용한 수다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어 퍼포먼스·뮤지컬을 선보이는 전문 공연단이에요. 초창기엔 대중가요에 수어를 덧입힌 춤을 주로 선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가면과 망토를 걸치고 공연하는 ‘수어퍼포먼스’, 우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안무를 만든 ‘수어 뮤지컬’ 등으로 장르를 넓혔습니다. 뮤지컬의 경우 농인들의 실제 사연을 바탕으로 창작해요. 공연의 질을 크게 높여서, 더 좋은 공연을 더 많은 분에게 선보이고 싶어요.” 김석휘(39) 단장의 목소리에, 자부심과 책임감이 섞여 있다.

자신들만의 수어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위해 그들은 주로 거리를 활용해왔다. 부산역, 서면, 해운대, 광안리 등 유동인구가 많은 부산의 번화가를 돌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공연을 이어왔다. 2013년부터 지금 까지 그들이 선보인 ‘길거리 수어 퍼포먼스’는 800회 남짓. 축제 현장이나 행사장의 초청이 늘면서 무대공연이 많아진 뒤에도, 거리 공연을 향한 그들의 애정엔 변함이 없다. 코로나19가 잠잠해져 더 자주 거리로 나설 수 있기를 그들은 간절히 소망한다.

“거리 공연을 마친 어느 날, 농인 한 분이 다가와 ‘고맙다’는 말을 수어로 해주신 적이 있어요.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우리 사회의 공연문화가 이분들을 얼마나 소외시켜왔는지, 우리가 왜 더 열심히 수어공연을 해나가야 하는지, 절절히 느낀 순간이었어요.”

수어 뮤지컬 〈홍연〉의 주인공인 송은혜(27) 씨의 말이다. 섬처럼 외로웠던 농인들과 꽃처럼 환하게 소통하면서, 미처 몰랐던 보람과 행복을 그는 톡톡히 느끼고 있다.

널리 수어를 퍼뜨리는 이유

수어 교육도 수어 공연만큼이나 중요한 조용한 수다의 과업이다. 창단 이듬해인 2014년부터 그들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주말 수어·점자 교실’을 운영해왔다.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 부산 시민들이 이 수업을 통해 수어와 점자를 배우고 익혀왔다.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은 그만큼 더 줄어들 것이다.

“청각장애나 언어장애를 가진 분들은 생명과 직결되는 위급상황에서, 의사소통 문제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문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 드리고 싶어, 2017년부터 ‘S.O.S(Suda is Obstacle Solution)’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단원들 각자가 자기 동네의 경찰서, 지구대, 소방서, 병원 등을 방문해, 현장 담당자에게 기초적인 수어와 농인들과의 교감 방법 등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에요.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해도, 수어 통역사가 현장에 오기까지 농인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울 수 있어요. 빠른 응급대처도 가능하고요. 지금까지 500회 이상 진행해왔어요.”

소외된 누군가를 향한 그들의 관심은 지역 내 어르신을 향해 자연스레 이어졌다. 부산 16개 구·군 가운데 노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중구는 어르신들의 고독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역이다.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 중 하나로 조용한 수다는 어르신 수어 합창을 생각해냈다. 10~15명의 홀몸 어르신을 모집해, 2018년부터 ‘청춘 합창단’이란 이름의 수어 노래단을 꾸려오고 있다. 치매도 예방하고 나들이도 즐기는 이 활동을 통해, 표정 없던 어르신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해졌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매월 1회 이상 지역의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해 ‘찾아가는 수어 교실’과 ‘찾아가는 문화예술’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말벗이며 시설 청소, 활동 보조 등을 병행했다. 나눔의 보람이 더욱 커졌다. 한때 100명 안팎까지 봉사자가 늘어났던 조용한 수다는 현재 15명의 단원이 열렬히 활동 중이다. 훨씬 작아졌지만, 더욱 강해졌다

어느새 숲이 된 8년 전의 씨앗

“2009년부터 5년간 항공사 케이터링 팀에서 일했어요. 근무지가 김해국제공항이었는데, 수어 통역사가 없어 출입국에 어려움을 겪는 농인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분들을 돕고 싶던 차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수어를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실습하고 싶어 1년을 꼬박 기다렸죠. 청각장애인 관련 연구소에서 사회복지현장실습을 하면서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농인들의 장사를 도와드리면서 수어 실력을 쌓기도 했고요. 수어가 저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줬어요.”

김석휘 단장의 ‘수어 입문기’다. 과거 부산의 1세대 춤꾼으로 활약했던 그는 공들여 익힌 수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2013년 조용한 수다를 창단했다. 알음알음 모인 여덟 명의 춤꾼과 노래꾼이 기꺼이 뜻을 함께했다. 2기 단원으로 합류한 김동현(29) 씨는 청각장애인이다. 선천성 난청으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만, 일반 학교에 다니느라 수어를 배우지 못했다. 그런 그가 조용한 수다에서 수어를 익혀, 농인 친구들과 활발한 소통을 마침내 하고 있다. 동현 씨는 현재 수어 교육팀에서 강사로 활약 중이다. 단지 봉사를 시작했을 뿐인데, 그가 속한 세상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어져 있다.

“초창기엔 연습실이 없어 거리에서 동작을 맞춰보곤 했어요. 현재는 중구에서 제공해준 40계단문화관에서 5년째 공연 연습과 수어 교육을 해요. 중구뿐 아니라, 부산의 모든 구에 수어 교실을 만드는 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김석휘 단장은 공인중개업과 아이스크림 판매점 운영을 비롯해 무려 다섯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공연 장비 구입비, 교재 제작비 등 만만찮은 운영경비를 자비로 충당하기 위해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그는 해처럼 웃으며 오늘을 산다. 산처럼 쌓여가는 나눔의 시간이, 별처럼 멀었던 꿈을 조금씩 가깝게 만들어주는 까닭이다. 둘러보니 모두가 웃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데, 그들의 계절은 여전히 새봄이다.

특별상
배금향 씨
땀으로 나눠온 봉사의 기쁨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칠 새도 없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것 같던 홀몸 어르신의 집 안을 기어이 말끔하게 치워내고서야 한숨을 돌리며 웃음 짓는 배금향(62) 씨다. 그가 우유와 신문 배달을 위해 새벽 두시 반에 하루를 시작하고, 배달을 마치자마자 버스에 올라타 봉사로 하루를 꽉 채운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2010년 우정선행상 장려상을 받은 이후에도 봉사를 멈추지 않은 배금향 씨에게 올해 다시 특별상이 주어졌다 .

궂은일도 내 일처럼 나서는 지역 최고의 ‘배반장’

“코로나19로 봉사도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봉사를 계속하고 있어요. 저소득가정 아이들을 위해 무료 반찬 나눔을 하고, 교통안전을 위해 투명우산 나눔도 하고 있지요. 요즘 많이 버려지는 아이스 팩을 수거하고 세척해 지역 상인들에게 다시 나눠주는 일도 하고 있어요. 홀몸 어르신들을 위해 집 안 청소도 한정된 인원 안에서 열심히 하고 있고요. 도움의 손길이 더 절실해진 분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배금향 씨가 궂은일도 상관없이 남을 돕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이웃들의 장례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염(殮) 하는 것을 돕던 어머니를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덕에 그에게 남을 돕는 삶이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조금씩 혼자 하던 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1998년 아파트 부녀회에 들어가면서부터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사람이 모여 하게 되면 이웃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부녀회가 전에 없이 주변 환경미화며 경로당 청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눔·봉사도 활발히 하다 보니, 주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함께 해달라고 하는 단체가 늘면서 배금향 씨는 부산아시아드볼런티어 자연환경팀장, 부산진소방서 의용소방대 지도부장, 부산진구자원봉사센터 행복봉사단 회장, 사랑의열매 나눔봉사단 부산진구지역 봉사단장, 부산친환경생활지원센터 캠프장 등을 역임하며 부산, 경남 일대에서 다양한 봉사를 펼치게 되었다. 태풍 매미 등 전국 재해·재난 복구 현장에 달려가 밤낮을 지새운 것도 여러 날이었다.

이제 주변 지역에서 봉사하면 배금향 씨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홀몸 어르신 집안 청소나 도배가 필요할 때는 부산진구청과 행정복지센터 등 관공서 담당자들에게 먼저 연락이 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많다. 배금향 씨는 봉사단체와 봉사가 필요한 곳을 연결해 주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분에게 적절한 정책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담당자들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교복을 맞출 형편이 안 되는 학생이 있다는 전화 한 통에 인근 졸업생 가정에서 교복을 얻어다 수선해 주기도 하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집을 청소하다 아파트 재활용 현장에서 필요한 가구를 금세 찾아 수리해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는 봉사에 있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만능해결사다.

먼저 마음으로 함께

“아들 넷을 키우는 주부가 새벽 배달로 번 돈을 헐어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계속해도 정말 괜찮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셨어요. 오히려 그 말이 속상하더라고요. 형편이 되고 가진것이 넉넉해야만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배금향 씨가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첫째와 막내의 나이 터울이 무려 열 살이나 되는 아들 넷이 한창 클 때였다. 그 무렵 중학생으로 엄마의 무료 급식 봉사를 도우러 온 셋째 아들은 때마침 취재를 온 부산 라디오방송에 ‘엄마를 봉사에 늘 뺏기는 것 같아요’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이런 뜻깊은 일을 하는 엄마라서 좋다’라고 실컷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큰아들이 36살이 되고, 둘째 아들이 사회복지사가 된 지금까지 아들 넷은 늘 엄마의 든든한 지지자이다. 처음에는 아내가 부업까지 하며 열심인 봉사가 못마땅했던 남편 강동범(63) 씨도 얼마 전 다쳐서 불편한 다리까지 이끌고 아내의 봉사 현장에 묵묵히 함께 하는 것을 보면 ‘가족봉사단’이라고 해야 맞다.

“저는 희한하게 봉사활동만 하면 피곤한 줄을 몰라요. 오늘 청소 간 집은 두 번째 방문인데, 처음에는 어떻게 하나 잠이 다 안 오더라고요.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르신의 집인데, 오래 방치되어 지저분한 것도 그렇지만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키우고 계셨고 바퀴벌레도 너무 많이 나오는 거예요. 하루 청소만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돼서 구청과 복지관 직원분들과 함께 다시 방문해서 바퀴벌레 약도 집안 곳곳에 놓고 짐도 어느 정도 베란다 쪽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죠. 그제야 집안이 좀 말끔해지더라고요. 어르신도 집안이 깨끗해지니 우울한 마음이 걷히고 살 생각이 든다며 좋아하셨어요. 마음에 계속 걸린 일이었는데, 얼마나 제 마음이 개운한지 몰라요.”

배금향 씨는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으냐는 질문에 즐겁게 하는 일이 힘들 게 무엇이냐고 답했다. 별일을 한 것도 아닌데 큰 상을 연이어 받게 되어 벅차고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11년 전 지역내 동사무소 복지 담당 공무원의 추천으로 제10회 우정선행상을 받았을 때는 주변에서 축하도 많이 해 주고 새삼 인정도 많이 받는 것 같아 기뻤다. 남편에게도 크게 한번 으쓱거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고 주변 요청이 많아지니 봉사할 수 있는 활동 범위도 넓어져 앞으로 더 열심히 해보리라는 다짐도 하게 됐다. 그런데, 생전 처음 듣는 단체에서 상금으로 받은 돈을 찬조해 달라는 요청이 자꾸만 들어와 난감한 일도 벌어졌다. 마음을 굳게 먹고 상금은 홀몸 어르신들 집 안 청소 후 쌀이나 이불을 사 드린다거나,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하신 분들 식사 한 끼씩 사드리는 비용 등으로 충당했다. 손에 쥔 것보다 늘 더 내어주는 그다. 그래서 더욱 배금향 씨에게는 이번 상이 이전에 받았던 상보다 의미가 크다. 제21회 우정선행상 특별상은 그간 정말 잘 해왔다고 수고 많았다고 격려하는 의미인 것만 같아 그간의 시간이 헛되지 않고 귀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다고 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는 삶 살 것

배금향 씨는 코로나19로 작년과 올해 계획했던 봉사활동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것이 지금 가장 아쉬운 일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유동 인구가 많은 서면 지하철역 및 지하상가 등지에서 방역 활동을 하거나, 예방접종센터에서 체온을 확인하고 노약자의 거동을 돕는 일 등이 대부분이다. 부족한 혈액 수급을 위해 지역 소방서에서 진행 중인 헌혈에도 주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혹시 문제가 될까봐 감기약 하나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조심하는 중이다. 그래도 그는 봉사자도 이렇게 힘든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고 하소연할 데가 없을까를 생각하면, 하나라도 더 나눌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앞으로도 배금향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활동을 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11년 전 그 마음 그대로 배금향 씨의 봉사에 대한 애정은 앞으로도 끄떡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