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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이야기

대상상록야학

본상강봉희

본상김정심

본상손으로 하나되어

특별상윤정희

대 상
상록야학
배움의 나무로, 희망의 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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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에선 요즘도 벽보로 학생들을 모집한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외면한 슬픔’은 故 박학선 교장이 한평생 몰두했던 삶의 화두다.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불러 모아, 46년간 드넓은 그늘이 돼준 한 그루 푸른 소나무. 삶이 그 자체로 ‘상록(常綠)’이던 한 사람의 뒤를 상록야학은 변함없이 이어간다. 희망의 숲이 나날이 울창해진다.

늘 푸른 학교에서 ‘더 푸른 학교’로
2022년 10월 25일은 박학선 前 교장이 영면에 든 날이다. 10여 년간 혈액투석을 해왔던 그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던 그 무렵, 한결같이 푸르던 84년 인생과 작별했다. 자신이 입원 중이던 대학병원에 3억 원을 기부한 직후였다. 가을걷이를 갓 끝낸 농부처럼,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나무처럼, 충만하고 평온한 마무리였다. 그의 삶은 과거형이지만 그의 뜻은 현재형이자 미래형이다. 그의 아내 한윤자(80) 씨가 새 교장을 맡아 상록야학의 ‘초심’을 꿋꿋이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박학선 교장은 이제 이곳에 없지만, 그가 남긴 향기는 갈수록 더 그윽하다. “장례식 때 제대로 알았어요. 남편이 상록야학을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이유를요. 이 학교를 거쳐 간 분들이 정말 많이 찾아와서 자신들의 소중한 추억들을 들려주고 가셨어요. 뭉클한 마음 가눌 길이 없었는데, 딸아이와 선생님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달라고 설득하더라고요. 그게 옳은 일인 것 같아 용기를 내보기로 했어요.” 한윤자 교장의 수줍은 답변 속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故 박학선 교장의 삶과 뜻이 고스란히 담긴 상록야학은 현재 50대부터 80대까지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못다 한 학업’을 잇고 있다. 교사는 약 40명. 돈 한 푼 받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기꺼이 내는 순수 자원봉사자들이다. 수업 과정은 각 2년제인 중학교와 고등학교, 지난해 새로 생긴 초등학교(1년제), 그리고 일종의 시민학교인 ‘열린강좌’가 있다.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인정받는 중·고교 과정이 상록야학의 ‘중심’이라면, 시니어들의 삶에 지혜를 선사하는 열린강좌는 상록야학의 ‘야심작’이다. 한국어능력, 생활영어, 고사성어와 한자원리, 자서전 쓰기, 컴퓨터, 열린 인문학, 상담심리 등 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가르친다. 나이 든 이들을 꾸준히 소외시키는 현대사회 시스템이 못내 안타까워 자체적으로 개발한 수업들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점점 더 작아지는 존재들에게 상록야학이 한 줌 빛이 되어 주는 것. 故 박학선 교장이 생전에 소망했던 일이다. 8,000명에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한 상록야학이 ‘늘 푸른 학교’를 넘어 ‘더 푸른 학교’로 나아가는 배경이다.
야학이라는 이름의 ‘치유공동체’

상록야학이 세워진 건 1976년 3월 7일의 일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기성 양복회사를 운영하던 故 박학선 교장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학교 설립의 배경에는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배고픔의 설움과 학업 중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박 교장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업이 번창 일로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시선은 거꾸로 어려운 이들을 향했다. “이문동사무소 2층 회의실을 빌려서 시작했어요. 동사무소 직원들과 인근 지역 대학생들 6명이 교사로 참여해줬고요. 벽보를 붙여 학생을 모집했는데 모두 36명이 오셨어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온 그분들과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던 기억이 나요.” 지난해 8월 병석에 있던 박학선 교장이 담담하게 들려준 추억담이다. 상록야학에는 학업 외에 소풍, 체육대회, 수학여행, 졸업여행, 상록의 밤, 일일 호프, 송년의 밤 등 매년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졸업식 땐 교복을 입고 단체 사진을 찍는다. 제때 학교에 다녔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 추억들을 늦게라도 쌓게 해주고 싶어서, 학교 문을 열 때부터 박학선 교장이 마음먹고 실행해온 일이다. 지금은 학생들이 주축이 돼 행사를 치른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이 학교의 모든 행사는 그 자체로 ‘축제’ 가 되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한풀이 마당이기도 해요. 상록야학은 7, 8월에 학생을 모집해 9월에 입학하는데, 그때 촛불을 켜고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모꼬지’를 열어요. 전쟁고아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보지 못한 사람, 자식들이 영어단어를 물어올 때 답해주지 못해 부끄러웠던 사람…. 저마다의 응어리를 보따리처럼 풀어놓는 시간이죠. 모두의 이야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입을 모아 말해요. 자기가 가장 힘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그때부터 서로에게 힘이 되기 시작합니다.” 황기연(64) 교무부장의 이야기에서 상록야학이 학업공동체이기 전에 ‘치유공동체’임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의 뜻에 ‘떠밀려’ 살아오던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처음 선택한 곳. 거기가 바로 상록야학이라고 그는 말한다. 배움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것임을 이 학교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한’을 풀기 위해 시작한 공부는 이내 ‘흥’으로 이어진다. 중·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대학 공부까지 하는 늦깎이 학생이 이 학교에는 많다. 그중 한 사람인 신숙자(83) 씨는 2021년 고졸 검정고시 최고령 합격자로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상록야학에도 아직 다닌다. 열린강좌를 들으며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야학에 대한 고마움을 입으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라 진심 어린 감사다. 상록야학은 그동안 1,300명 남짓의 교육봉사자를 배출했다. 그중 한 사람인 황기연 교무부장은 서울시립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2년부터 지금껏 봉사를 이어왔다.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10년전부터는 학교 살림을 도맡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41년이 그에겐 모두 행복의 무늬로 남아 있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박용준(63) 교사는 상록야학에서 공부한 뒤 1992년 이 학교로 돌아와 지금껏 학생들을 가르친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는 김동철(48) 교사도 상록야학에서 공부한 졸업생 자원봉사자다. 이 학교의 모든 컴퓨터를 그가 20년 넘게 관리하고 보수해왔다. 나눔으로 돌아온 나눔이 여간 아름답지 않다. “사업이 부침을 겪으면서 야학 운영이 어려울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학교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학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성장하는 것처럼 마음이 좋았어요. 그러니 ‘보람’이란 말은 너무 거창하고, ‘기쁨’이란 말이 적합할 것 같아요.” 학생들과 함께한 46년에 대해 故 박학선 교장이 밝힌 마지막 소회다. 나눔이 익으면 ‘낮춤’이 되고 사랑이 깊으면 ‘희망’이 된다. 생의 촛불은 비록 꺼졌지만, 그가 밝힌 ‘꿈의 등불’은 오늘도 환히 켜져 있다.
본 상
강봉희
따뜻하게 배웅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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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반대말이지만 강봉희(70) 씨에겐 동의어인 낱말들이 있다. 생(生)과 졸(卒)이 그렇고, 죽음과 웃음이 그렇다. 그는 봉사하며 살다 농담하며 죽는 것이 꿈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믿는 사람답게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치고 싶다. 무연(無緣)과 인연도 그런 단어들이다. 연고 없는 고인들과 연을 맺어온 지 어느덧 18년. 쓸쓸했던 죽음들을 존엄하고 따뜻하게 배웅하면서, 비움과 나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죽음에서 삶으로, 비움에서 나눔으로

먼지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자유롭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장례지도사인 그는 장례로 버는 돈이 한 푼도 없다. 사람의 도리를 했다는 마음. 얻는 수익이라곤 단지 그것뿐이다. 그가 이끄는 (사)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도 마찬가지다. 나눔만을 위해 설립했고 그것밖엔 하지 않는다. 목적이 하나뿐이니 초심이 그대로다. 빈손 흔드는 가을날의 억새처럼, 수수하되 눈부신 하루하루를 오늘도 살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죽음들이 있어요. 홀로 돌아가셨거나 가족과 인연이 끊긴 분들, 장례비 마련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자…. 그런 분들의 장례를 치러드려요. 외롭게 살다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따뜻이 배웅해 드려야죠.”
사람들은 그에게 궁금증을 갖는다. 왜 하필 고인들을 돌보는지, 장례로 밥벌이를 할 것도 아닌데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딴 이유가 무엇인지…. 해답은 그의 과거 속에 있다. 한때 그는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대구 동성로에서 건축업을 하던 그는 마흔세 살이던 1996년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4기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수술과 항암·방사선 치료를 잇달아 받고 마침내 병석에서 일어났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3년 뒤 암이 재발했고, 그 힘든 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2002년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입원해서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는 제 눈에 한 장면이 유독 마음을 흔들었어요. 병실 바로 옆이 장례식장이었거든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이 시신을 싣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 일’을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만약 살아서 여길 나간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지, 비우고 나누면서 인간답게 살아야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꿈이 그렇게 생겼어요.”
홀로였던 죽음들을 같이 돌보는 보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는 또 한 번 암을 이겨냈고,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장례지도학과에서 꿈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학업을 마친 2004년 11월엔 함께 공부한 장례지도사 선후배들과 봉사단을 꾸렸다. 대표인 그를 포함해 이사 여섯 명과 감사 두 명이 장례의 전 과정을 진행하고, 필요경비는 여덟 명의 운영진이 매월 백만 원씩 내가며 충당했다. 이후 마음을 보태주는 회원들이 생겨났다. 2023년 현재 봉사단의 회원은 약 300명. 그중 회비를 내는 회원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봉사단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제법 큰 힘이 된다. 고인이 기초생활수급자일 경우 나라에서 80만 원의 장례비를 지원해주는 것으로 제도도 개선됐다. 덕분에 지금은 그와 동료들의 경제적 부담이 처음보다는 줄어든 상태다. 한 가지 뭉클한 것은, 고인이 된 한 사람을 빼고 초창기의 운영진이 여태 그와 함께라는 것이다. 18년간 900명에 가까운 고인들을 같이 보내드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우정을 그들은 변함없이 나눠오고 있다.
“우리가 장례를 치러드리는 고인의 90% 정도는 관(官)에서 의뢰해오는 분들이에요.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오면 시신 수습부터 안치, 염습(殮襲), 입관, 화장, 유골 수습, 봉안까지 모두 진행해 드려요. 화장증명서와 봉안증명서를 구청에 제출하는 것까지가 저의 역할이에요.”
장례식장에 시신을 안치하면 유족에게 알려야 하는데,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꽤 된다. 이 경우 해당 주소로 등기를 보내 14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가 마음 아픈 것은 장례식장에 내야 하는 그 기간만큼의 시신 안치료가 아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음들. 그 마지막이 너무 쓸쓸해서 자주 목이 메어온다. 고독사로 생을 마무리하신 분들의 경우 가슴이 더 미어진다. 시신이 늦게 발견되는 경우 훼손이나 부패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생각해요. 누군가 조금만 돌봐줬다면 한 사람의 마지막이 이토록 험하진 않았을 거라고. 이분들을 저는 ‘괄호 밖의 사람들’이라 불러요.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돼요. 그들을 괄호 안으로 들여와서, 오며 가며 같이 들여다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일이 ‘사람답게’ 사는 일로 어느덧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 라는 그의 말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된다.
봉사하며 살다가 농담하며 죽는 꿈

조용히 해온 봉사가 세상의 이목을 끈 건 2020년 2월 대구 코로나19 확산 때다. 아무도 하려 하지 않던 시신 수습을 그가 도맡았다. 대구시청 담당자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그도 난감했다. 코로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때라 자신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두려웠다. 고민해 보겠다고 말하고, 아는 의사들에게 물어봤다.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도 힘을 못 쓴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한번 해보기로 했다.
“동료들에게 같이하자는 전화를 돌렸어요.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누군가 해야 한다면 우리가 하자고 이내 답해주더라고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때부터 석 달 동안 코로나로 세상을 등진 스물네 명을 그들이 배웅했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을까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그는 유독 잊지 못한다. 70대 남성이 코로나로 사망했는데, 유학 생활로 오래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30대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이라도 보여달라’며 사정해왔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24시간 안에 화장하는 것이 당시 병원에서 사망한 코로나 환자의 장례 절차였다. 규정대로라면 방법이 없는데도 그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묶은 관을 열고 밀봉한 시신을 푼 뒤, 10m쯤 떨어진 거리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해줬다. 방호복을 입은 채 하염없이 울던 아들의 얼굴이 여태 눈에 선하다.
“장례 봉사를 해오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오고 있어요. 하나는 유가족들에게 가족사를 묻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는 일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 거예요. 슬프게 돌아가신 분들이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고인과 유가족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2007년 건축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그는 그 선택이 자신을 살렸다고 생각한다. 봉사가 전업이 되니 욕심이 절로 사라졌고, 비워진 마음 안으로 웃을 일이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꿈꾼다. 봉사하며 살다가 농담하며 죽기를, 수의 대신 평상복을 입고 ‘살던 대로’ 떠나게 되기를…. 그 꿈을 입증하는 사진 하나가 봉사단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그가 익살스레 웃고 있는 사진이다. 그는 그걸 영정사진으로 쓸 생각이다. 죽음과 웃음이 하나다. 무거웠던 마음이 문득 가벼워진다.
본 상
김정심
오직 오늘뿐, 봉사로 채워갈 바로 지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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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없다.’ 김정심(77) 씨는 이 말을 자주 쓴다. 희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생애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를 하루를 아름답게 보내겠다는 의미다. 이십 대부터 지금껏 온갖 질병과 싸워온 그는 몇 차례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흔들림 없는 인생을 산다. 봉사가 그 비결이다. 42년간 거의 매일 실행해온 나눔이, 죽음에서 삶으로 그를 이끌고 간다. 후회도 걱정도 없다. 그에겐 오직 봉사로 채워가는 ‘오늘’뿐이다

고통의 늪에서 봉사의 숲으로

‘홀가분하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거추장스러움 없이 가볍고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이 산뜻한 낱말의 뜻을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안다. 내일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자신에게 수시로 물어온 날들. 그에 대한 답을 차곡차곡 삶으로 옮겨온 반평생이다. 앓고 있는 질병이 많아 매일 한 움큼씩 약을 먹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늘 청명한 가을하늘 같다. 여한 없이 나눔을 실천하면서, 미련 없이 또 하루를 살아간다.
“그게 참 신기해요. 각종 통증에 시달리다가도, 봉사하는 시간만큼은 언제 아팠냐는 듯 말짱해져요.”
고통에서 그를 구하는 건 언제나 의사보다 ‘봉사’가 먼저다. 젊은 날부터 그는 늘 질병과 함께였다. 첫 아이를 업고 다니던 이십 대의 어느 날 가슴이 심하게 뛰어 병원에 갔다가 생애 첫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심장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라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어떡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그때 처음 생각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였다. 또 하나의 큰 병이 그를 찾아왔다. 갓난아기였던 셋째를 씻기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강직성 척추염이었다.
“힘들게 일했다 싶으면 척추뼈가 하나씩 튀어나왔어요. 이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절로 한숨이 나왔죠.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꿨어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값지게 지내기로요.”
나눔보다 배움이 먼저였다. 1979년 부녀복지관으로 문을 연 서울특별시남부여성발전센터에 여성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많았다. 거기서 미용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취득했다. 1980년의 일이다.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의 머리를 수시로 잘라주는 것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미용실을 차리지는 않았다. 배움이 나눔에 쓰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이·미용 봉사를 시작한 건 1985년에 서울특별시서부여성발전센터에서 한복 짓는 법을 배우던 무렵이었다.
“우리에게 한복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이·미용 봉사를 하고 계셨어요. 미용 기술이 없는 본인보다 제가 더 적임자일 것 같다며 서부여성발전센터 이·미용봉사단을 소개해 주셨죠. 그때부터 봉사가 제 삶의 1순위가 됐어요.”
가장 낮고 가장 아픈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맨 처음 봉사하러 간 곳은 대방동에 있던 옛 서울시립남부부녀보호소다. 당시 그곳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와서 봉사자들이 퍽 힘들어했다. 어느 날 그곳의 한 분이 그에게 말했다. 2층에도 사람들이 있으니 머리를 잘라줬으면 좋겠다고. 그분을 따라 올라가니 소변이 흥건한 비닐 위에 거동이 안 되는 이들이 그대로 누워있었다. 밀려오는 감정들을 모두 지우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그분들의 머리를 손질해 드렸다. 그렇게 2층 전담이 됐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던 경험이 그에게는 어느덧 ‘용기’라는 이름의 자산이 돼줬다. 이후 서울시립영보자애원, 해방모자원과 성심모자원 등 소외된 여성들이 있는 곳을 따로 또 같이 찾아가 미용 봉사를 이어갔다. 요셉의원에서 노숙인들의 머리도 잘라드렸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따라다녔다. 어르신들도 열심히 만났다. 난곡경로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이·미용 봉사를 하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그 즉시 달려가 머리를 손봐드렸다.
“1993년부턴 관악구립중앙사회복지관에서 봉사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그곳으로 달려가 어르신들의 머리를 잘라주고 와요. 시작할 땐 그곳 분들이 제 부모님 연배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제 또래가 됐어요. 코로나19 이후엔 각 가정으로 직접 찾아가서 머리를 잘라드려요. 한 분 한 분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 시간이 저는 참 좋아요.”
봉사하는 모든 날을 좋아하지만, 그중 그가 가장 행복해하는 날은 매월 셋째 주 금요일이다. (사)양심수후원회가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어드리는 시간이다. 2000년 관악구립중앙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의 소개로 이곳과 인연을 맺은 그는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의 머리를 매달 잘라드리면서 현대사의 비극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6·25전쟁 당시 부모님과 큰오빠를 잃은 가족사가 그에게는 있다. 그런 그에게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타인의 아픔을 포용하고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는 계기가 돼줬다. 어르신들의 1차 송환 땐 그가 머리를 잘라드렸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예쁘게 잘라 달라’며 환히 웃던 얼굴들을 그는 잊지 못한다. 남아 있는 어르신들과는 가족처럼 지낸다. 서울의 한 동네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마당 가득 온갖 채소와 나무를 심어놓은 어르신들은 손수 기른 작물들을 그에게 매번 한 아름씩 안겨준다.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번번이 가슴이 뭉클해온다.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르신들이 면회를 오신 적이 있어요. 해드리는 것보다, 제가 받는 것이 더 많아요.”
생애 마지막 날이 ‘봉사일’이기를 꿈꾸며

지난 40여 년 동안 그의 일주일은 거의 나눔으로 채워졌다. 이·미용 봉사만이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안내 봉사를 맡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봉사 정년(만 75세)을 맞을 때까지 고대구로병원과 보라매병원에서 안내 봉사와 사무보조 봉사를 했다. 중앙대학교병원에선 병원문고 책 대출을 담당했다. 요일별로 시간을 쪼개가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봉사를 기꺼이 해왔다. 2019년엔 캄보디아에서도 이·미용 봉사를 했다. 2018년 교회 사람들과 캄보디아로 선교를 나갔다가 그곳 사람들의 덥수룩한 머리를 보고 이듬해 여름, 이발 도구를 챙겨갔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사랑과 나눔의 꽃이 핀다.
“그 몸으로 무슨 봉사냐는 말을 지겹게도 들었어요. 강직성 척추염 외에도 저에게는 간경화, 담석증, 통풍, 지방간, 고혈압, 고지혈증이 있어요. 위암 수술을 시작으로 자궁, 무릎, 어깨 수술도 받았고요. 가장 큰 문제는 10여 년 전 진단받은 만성신부전이에요. 강직성 척추염 때문에 진통제를 과하게 복용하면서 생긴 질환인데, 병원에선 그때 저에게 석 달도 채 살기 힘들 거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내일이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요. 삶의 마지막 날 가장 하고 싶은 일, 저에겐 그게 봉사예요.” 늘 걷던 나눔의 길에 그는 매일 처음처럼 발을 디딘다. 날마다 초심(初心)이니 오늘도 꽃길이다.
본 상
손으로 하나되어
반짝반짝, 마음을 비추는 손짓들
수상자 영상 보러 가기
올해로 20주년. 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선 곳이 있다. 바로 수어 봉사 동아리 ‘손으로 하나되어’이다. 각종 장애인 축제, 장애인 체육대회 등 수어 통역이 필요한 곳에는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함께해 왔으며, 청각장애인 가정의 비장애인 자녀와의 소통을 위해서도 애를 써 왔다. 어떻게 그들의 수어가 단순한 통역일 뿐일까. 그들의 손짓은 세상을 열고, 마음을 보듬는다.

수어가 좋고 봉사가 즐겁고

“아이고, 도와드리려다 부러져 버렸네. 그러~엄, 다시 이으면 되지요.”
이번에는 청각장애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라탄바구니 만들기 수업이다. 수원농아인쉼터에서 진행된 손으로 하나되어(이하 손하나)의 문화 체험 수업은 활기로 가득하다. 초청 강사가 설명과 함께 바구니 만들기 과정을 보여주면, 손하나 봉사자들은 수어로 전달하고 미숙한 작업도 돕는다. 그럴싸하게 완성되어 가는 바구니를 든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는 모습이 정답다. 모두 함께 즐거운 시간이다.
손하나는 2003년 경기도수어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은 평범한 직장인 4명으로 출발했다. 만들어질 당시에는 수어 봉사자 인력이 부족한 경기도농아인협회 수원시 지회의 도움 요청으로 시작한 곳이었지만, 곧 회원들이 스스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회원이 한 명, 두 명 늘어나 현재 12명이 활동 중이다.
동화구연 교사로 일하는데 더 많은 아이를 위해 수어를 배우다 손하나 활동을 시작했다는 회원, 중학교 2학년 무렵 전학 간 곳에서 만나게 된 특별한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시작한 수어가 봉사로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남동생과 조카들에게까지 수어를 권하고 있다는 회원, 자신의 봉사에 감명받은 시어머니까지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회원 등 손하나 회원 한 명 한 명의 사연에 수어와 봉사에 대한 진심이 담겨있다. 흔히 수어 교육을 받으면 자격증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순수하게 수어 교육만 마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 그 진심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다. 손하나의 회원들은 대가는커녕, 오히려 주말을 반납하고, 육아도 잠시 맡기고, 직장에 휴가를 내서 참여하고 있다.
문화 체험 지원부터 코다(CODA) 소통까지

“청각장애인분들을 가까이 뵐수록 수어를 전문적으로 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좀 틀려도 괜찮다 하시며 오히려 알려 주시기도 해요.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보고 고마워하시죠. 행사 때마다 본다고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손하나는 특히 청각장애인 부모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 사이의 소통을 돕는 일에 애정을 쏟아왔다. 처음에는 행사에 청각장애인 부부가 데려온 어린아이들을 보고 도서를 지원해 주고 책을 읽어주던 일이, 매달 대여섯 코다 가정의 소통을 돕는 일로 발전했다. 아이 키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더욱이 청각장애인 부모는 때때로 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아이들은 눈짐작으로 배운 수어가 정확하지 않아 더 갈등이 생기기 쉽다.
게임 중에 욕을 하는 아이의 상황을 부모에게 알려 주어 관심을 기울이게 한 일이나 아이 숙제에 필요한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협회에 이야기하여 구해준 일, 아들이 부탁한 택배가 잘못 배송되었을까 봐 전전긍긍 하는 청각장애인 부모를 도와준 일 등 사소하지만 필요한 곳에 손하나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장래 진로를 고민하거나 장애가 있는 부모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손하나 봉사자들은 자신의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도움을 건넸다. 도움을 받던 코다 중에 벌써 대학생이 되어 봉사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손하나에게는 더욱 각별한 활동이다.
코로나19 확산 시기에도 온라인 화상 수업 서비스를 통해 코다 가정과의 소통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따라 할 수 있는 활동을 골라 진행하면, 옆에서 다른 회원이 수어 통역을 해 주는 방식이다. 아이는 활동을 따라 하고 부모도 아이가 하는 활동에 참여하거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손하나가 개설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회원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도움을 받은 청각장애인 부모와 자녀들이 가입되어 있는데, 그 수가 111명이나 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정이 도움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필요로 하기에 감사할 뿐

올해부터는 직접 만나는 문화 체험을 2~3달에 한 번씩 다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수어의 특성상 아무래도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 체험 진행은 2~3달에 한 번 있지만, 기획이며 답사, 관련 공부 등 할 일이 참 많다. 정기적인 행사 지원까지 있으니, 회원들은 못 해도 한 달에 2~3번은 만나는 꼴이다. 회비만으로는 부족한 활동비를 보충하기 위해 각 지역 수어 경연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아오기도 하고, 소소한 수공예품이나 비누를 만들어서 팔기도 한다. 알찬 문화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유튜브를 보며 여러 아이템을 모색하고 공부한다. 화상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여러 곳에 물어물어 배울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도 털어놓는다.
“저희를 필요로 하시니까요. 다른 장애와 달리 청각장애인분들을 돕기 위해서는 작은 길 안내 하나에도 반드시 적당한 수어가 필요해요. 별것 아닌 도움에도 많이들 고마워하세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이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물음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도 손하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소통의 장을 만들어갈 것이다. 특히 청각장애 어르신들, 코다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에 주력할 계획이다. 그들이 즐거운 체험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늘 반짝반짝 손을 흔들어온 그들의 수상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특별상
윤정희
제8회 우정선행상 대상 수상자였던 윤정희(59) 씨를 제23회 우정선행상 특별상 수상자로 다시 만나는 것은 꼬박 15년 만의 일이다. 새댁같이 웃던 그는 어느덧 세월의 향기를 풍기는 중년이 되었고, 공개입양해 사랑으로 기르는 아이는 다섯에서 열한 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굳이 누가 나서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힘들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행복하다’, ‘기쁘다’ 그리고 ‘감사하다’라는 말로 대신할 뿐이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하다.’ 이것은 사전에서 설명하는 ‘행복’의 정의다. 물론 사람마다 행복의 척도는 다르기에 그 정의를 명확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행복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윤정희 씨는 삶 속에 진짜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을 찾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몸소 증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우정선행상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당시 대전에 살던 그는 자신의 집을 팔아 형편이나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무료 공부방인 ‘함께하는지역아동센터’를 열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무려 마흔다섯 명의 아이를 돌봤다. 그곳은 ‘방과후 공부방’이라기 보다는 ‘방과후 가정’에 가까웠다.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데 더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때 저희 부부에게는 이미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어요. 모두 공개입양을 통해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 이었죠. 결혼 후 아이를 여러 번 가졌지만, 모두 유산으로 잃고 말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아이를 갖기 힘들게 됐고, 대신 가슴으로 낳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은 모두 조금씩 아프거나 약간의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에게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폐 기능이 좋지 못해 온갖 고생을 하던 둘째 아이가 병이 완쾌되자 그는 감사의 의미로 남편과 함께 신장을 기증했다. 외국인 여성을 생모로 둔 넷째 아이를 맞이하면서 그는 이주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도 시작했다. 아이들과 인연을 더해갈수록 그의 봉사도 더해졌다.
우정선행상 대상을 받은 직후 그는 아이 한 명을 더 입양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다섯 명 이상의 아이를 입양한 사례가 없었기에, 그는 더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제 그에게는 총 열한 명의 아이가 있다. 하은(26), 하선(25), 하민(21), 요한(20), 사랑(19), 햇살(19), 하준(19), 한결(18), 윤(16), 하나(13), 행복(11)까지. 아이들은 모두 부부를 닮아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일이자 감사함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나누며 사는 여러 방법 가운데 저는 문을 열고 삶을 함께하는 걸 선택했어요. 내 집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아이들이 정말 잘 자라주고 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어서오세요, 여기는 ‘강릉 행복이네’입니다

13년 전 그의 가족은 대전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했다. 목사인 남편이 강릉아산병원에서 병원 사역을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바다도 산도 지척인 이곳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그의 삶에 행복을 더해주고 있다. “강릉에 이사 온 직후부터 아이들과 함께 홀몸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도시락 봉사를 하고 있어요.
주말마다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배달하고 있죠. 그리고 겨울에는 연탄 나눔 봉사를 해요. 2011년부터 우리 가족이 강릉연탄은행 홍보대사를 맡고 있거든요. 얼굴에 검정 칠을 하고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면서도 같이 깔깔대면서 봉사하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그의 집 입구에는 ‘강릉 행복이네’라는 특별한 명패가 있다. 막내인 행복이의 이름을 딴 소중한 이름이다. ‘행복이네’라는 이름만큼이나 그의 집에는 늘 행복이 가득하다. 가정의 따뜻한 품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위해 언제나 그 문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특히 방학 기간이 되면 행복은 몇 배로 더 커진다.
“방학마다 스무 명 안팎의 아이들이 머물다 가요. 방학만이라도 따뜻하게 지내다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죠. 작년에는 두 명의 자립준비청년이 넉 달간 살다 가기도 했어요. 아동양육시설을 퇴소한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부모처럼 보살펴줄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립준비청년의 보호자 역할이 비단 자신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하기를 바라는 가슴으로 ‘투게더’라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지원금을 모을 통장도 마련해 뒀다. 캐나다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첫째 하은이와 강릉아산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둘째 하선이가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기부도 했다. 품 안의 자식으로만 생각했던 아이들이 가치 있는 나눔을 할 줄 아는 성인으로 자랐다는 것이 여간 자랑스럽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제 인생의 이정표 같아요. 대전에서 공부방 할 때부터 집에 늘 다른 집 아이들이 북적였는데도, 우리 애들은 그걸 싫어하지 않았어요. 더불어 사는 게 즐거움 아니냐며 외려 기쁘게 받아들였죠. 열한 명의 자식이 아니라 열한 명의 스승과 살고 있어요.”
아이들 덕분에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며 아이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하는 윤정희 씨. 그를 보며 행복이란 누구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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